조선 산업은 우리의 자존심이 됐다. 중국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확실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은 저가, 한국은 고부가 선박 건조로 양분하면서 한국은 배 잘 만드는 나라로 정평이 나 있다. 해방 후 나룻배 하나 못 만들던 우리가 조선 강국이 된 것은 선지자(先知者) 덕분이다.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과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시대와 동떨어진 인물일지 모르지만 상기(想起)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주영이 조선소를 만든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 때문이었다. 국가적 중요 사업이었던 포항제철소 완공을 앞두고 제철소에서 생산된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 줄 산업이 필요했다. 그 대안이 조선소였던 것이다.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먼저 삼성 이병철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다음 화살이 정주영에게로 향했다. 박 대통령의 끈질긴 설득 끝에 정주영은 결국 승낙하고 만다.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우선 자금이 문제였다. 대형 조선소를 지으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순간 생각해 낸 것이 차관이었다. 그러나 차관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일본에도 가고 미국으로도 가보았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만 당했다. “너희 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 십만 톤의 배를 만들고 조선소를 만들 수 있느냐?”며 무시했다. 이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은 자동차 하나 못 만드는 나라가 배를 만든다고 하니 황당한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진리는 정주영에게도 통했다. 그 유명한 거북선의 일화는 여기에서 나온다. 1971년 차관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영국은행 버클레이즈와 협상을 벌인다. 이에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도어에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타당성 있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사업계획서는 만들어졌지만 추천서는 도저히 해줄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회사를 추천할 만한 신뢰가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정주영은 직접 런던으로 날아갔다.
런던에 도착해 찰스 롱바톰 회장을 만났으나 그는 비관적인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자 정주영은 바지 주머니에서 거북선 그림의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는 1800년대부터이지만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거북선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함선을 괴멸시킨 역사적인 철선이다. 한국이 갖고 있는 무궁한 잠재력이 바로 이 돈 안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에 찰스 롱바톰 회장은 “정말 당신네 선조들이 이 배를 만들어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말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정주영은 “그렇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만든 배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된다면 훌륭한 조선소와 최고의 배를 만들 수 있다”라고 답했다. 그 얘기를 들은 롱바톰 회장은 잠시 생각한 뒤 지폐를 내려놓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조상을 두었소. 당신은 당신네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할 거요”라고 말했다.
수많은 프레젠테이션과 완벽하게 만든 보고서에도 ‘NO’를 외쳤던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바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다. 이렇게 그가 써준 추천서로 차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한국의 조선 산업은 일취월장(日就月將) 했다. 앞서가는 일본을 기분 좋게 따라잡고 세계 속에 우뚝 섰다. 철강업계의 중요한 수요처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잘 나가던 우리 조선 산업에 복병으로 등장한 것이 중국이다. 내수를 앞세운 저들은 곳곳의 싸구려 선박을 잠식해 갔다. 이에 2023년 3년 연속 글로벌 수주 1위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선소별 수주 잔량(점유율)에서는 1위부터 4위를 휩쓸면서 자존심을 지켰다. 수주량에서는 밀렸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고부가 수주 비중을 늘리며 실리를 챙긴 것이다.
어느 산업 구분 없이 물량공세는 중국의 특기다. 조선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고부가선으로 앞서가고 있지만 저들의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싼 것이 비지떡’으로 취급하며 마냥 하대하던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강력한 경쟁력으로 작용하는 것을 숱하게 경험하고 있다. 철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보고 있는 우리다. 고부가선에서 우리가 80%라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갖고 있지만 안도할 수 없는 이유다. 저들이 갖고 있는 20%는 가격을 무기로 산불처럼 소리 없이 고부가선으로 옮겨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제철이 미국의 자존심과 같은 US스틸 인수에 돌입했다. 이에 정치권 반대의 목소리가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미국은 주요 산업 소재를 안보 차원에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야당인 공화당뿐 아니라 여당 민주당도 국가 안보가 걸려있다며 해외 기업의 인수합병(M&A)을 승인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먹고 먹히는 엄혹한 생존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선조들이 힘겹게 일구어 놓은 산업을 후세의 나태함으로 후퇴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 특히 철강과 조선 산업 종사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