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보고서, '논란 부를 내용' 다 빠진듯

구체적 감축 목표, 통합방안 제시 등 사라져
원론적 진단 불구…“초등학생도 쓸 수 있는 수준 불과”

2016-09-28     방정환

  지난 4개월여에 걸쳐 작업했던 한국 철강산업 구조조정 방안이 무용지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한국철강협회를 통해 28일 밝혀진 최종보고 내용이 구체적 콘텐츠 없이 원론적인 진단에 불과해 컨설팅 효용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철강산업 구조조정안은 정부의 기업활력을 위한 특별법(원샷법)이 올 2월 국회를 통화한 이후 한국철강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의뢰해 조사분석 및 작성이 시작됐다.

중간 보고서는 지난 7월 20일 나왔지만 당시 지적한 내용이 업계 현실과 맞지 않다는 반발이 거세지면서 최근까지 수정을 거쳤다. 당초 마감 기일로 정해졌던 8월 31일을 훌쩍 넘기고 9월 하순에서야 마무리 될 정도로 업계의 반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 1차 보고서 내용이 불러온 파장

  중간보고 내용 중에서는 철근·후판·강관 등 세 가지 품목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비교적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철근은 지역별 그룹핑 및 기업별 통폐합을 거쳐 각 공장을 대형화·거점화하자는 제안을, 후판은 포스코와 현대제철, 동국제강 3사에서 400만~500만톤 규모의 설비 감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관의 경우 가장 큰 생산업체가 중소 업체들을 인수·합병해야 한다고 분석한 것이다.

  당초 제시됐던 철근 시나리오는 수도권 공장은 동국제강으로, 충청·호남권은 환영철강, 영남권은 대한제강으로 통폐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각 지역별로 분산돼 있는 철근공장을 거점별 메가공장으로 통합해 운영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철근시장은 매년 1천만톤을 밑돌고 있고, 수입산 철근은 지난해 약 120만톤까지 증가한 상태다. 따라서 현재 생산체제라면 과잉상태가 아닌, 수요와 공급이 적절한 상태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최대 생산업체인 현대제철이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는 것으로 비춰져 반발이 거셌다.

  최종 보고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스케일 기반의 수익성 개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했는데, 이 표현은 결국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생존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비 신증설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업체들이 '알아서' 판단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라는 진단이기 때문에 통합ㆍ합병이 필요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비춰진다. 

  구체적인 감축량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던 후판도 원론적인 진단만 내리고 말았다. 후판 생산능력은 약 1,200만톤 규모로 포스코가 700만톤, 현대제철 350만톤, 동국제강 150만톤을 보유하고 있는데, 동국제강은 이미 포항 1ㆍ2후판공장을 폐쇄하며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BCG는 조선산업 위축으로 조선용 후판 수요가 줄면서 후판 공급과잉 기조가 지속될 것이라며 적절한 생산능력 감축을 권고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이 늘면서 생산부하가 확대되고 있고 아직도 많은 양의 수입재가 유입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단순히 숫자 맞추기로 구조조정을 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공급과잉 상황에서는 생산량을 줄이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해서 기술개발하고 경쟁력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이 후판업계의 공통된 생각이다. 

  특히 중국발 공급과잉에 대한 해결방안 없이 단순히 생산규모를 줄이라는 주장만 담았다며 반발하면서 설비 감축으로 생산이 줄어든 틈으로 중국산 철강재가 침투해 안방시장을 고스란히 내주는 결과만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관업종도 대표적인 공급과잉 업종으로 지목되면서 기업활력특별법을 활용해 업계 자발적으로 업체수를 줄여야 한다고 진단했지만,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설비 감축이 필요한 지, 업계 통합 등의 구체적인 솔루션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관 역시 단순히 설비능력과 국내 수요만을 두고 산술적인 계산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용두사미로 끝난 용역조사, 산업계 재편의 시발점 될까?

 이미 중간 보고서 일부 내용이 노출되면서 철강산업 구조조정안에 대한 업계의 기대는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컨설팅이 자발적 참여를 전제하면서도 각 기업의 의견 수렴이나 공론화를 통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조조정이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정부의 역할도 빠져 있다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에 연간 들어오는 중국산 등 수입 철강재는 2,000만톤을 크게 웃돌고 있다. 수입이 공급요인의 한 축임에도 국내 생산만을 규제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수입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부터 반덤핑 조사 및 관세 부과 등으로 보호무역주의 노선을 강화하고 있고, 그 결과 뉴코어, US스틸, AK스틸 등은 올 상반기 실적을 대폭 개선했다. 이 같은 보호무역주의는 전 세계로 확산돼 트렌드가 되고 있으며, 한국 철강사들이 미국에서 받은 반덤핑 제재는 열연, 후판, 냉연, 도금, 강관 등 주력 제품이 모두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각국의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가운데 연간 수천만톤에 달하는 수입재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없이 설비 감축 등의 구조조정을 한다면 안방을 더 내주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꼬집었다.

  우리나라 시장의 30% 이상을 잠식하고 있는 중국은 2020년까지 1억5,000만톤에 달하는 설비 능력감축을 목표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산설비를 감축하는 것이지만 바오산강철과 우한강철을 합병하는 등 단순한 설비 감축이 아닌 세계 2, 3위의 대형 철강사를 만들고 다른 기업들도 최신예 공장으로 탈바꿈시켜 경쟁력을 키워나가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차별되고 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미 산업계 구조조정을 세 가지 트랙으로 접근한다면서, 조선이나 해운과 달리 철강업종은 ‘업계 자율’에 맡긴다고 했다. ‘업계 자율’에 맡겨진 구조조정 시나리오가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철강협회 관계자는 “이번 용역조사는 철강산업에 대한 건강검진이라 할 수 있다. 검진 결과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적절한 치료법으로 고쳐나가고, 건강한 상태라고 한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나”라며 “회원사 의견을 다양하게 수렴해 최종 완료한 만큼 이를 스타팅 포인트로 해서 철강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