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8] 한국 철강산업을 이끈 ‘스틸맨’

‘박태준’으로 시작된 韓國 최초 ‘일관 제철사업’ 철과 같은 마음으로 ‘이운형 회장’ 세상을 아름답게 뜨거운 삶의 한가운데 철강인 ‘장상태 회장’

2024-06-17     박재철 기자

철강 산업은 자동차, 조선, 기계 건설 등 대부분 산업에 기초 소재를 공급하는 핵심 산업이다. 대다수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고 있어 ‘산업의 쌀’로도 불린다. 이에 전 세계 국가들은 산업화 시대 경쟁력으로 철강사업을 육성해 온 역사도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과거 개발시대 산업화의 주역으로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국철강산업은 1945년부터 지금까지 국가기산업으로 정부의 정책지원과 민간의 경영 노력이 조화를 이뤄 국내 경제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충실히 해냈다. 한국 철강의 태동기는 국유화를 통해 1948년 대한중공업공사(현재 현대제철)이 설립되며 시작됐다. 이후 현재 동국제강인 부산제철소가 1963년 전기로를 도입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철강 산업은 상하 공정 간 심각한 불균형 문제가 있었다.

1970년대 성장기에 들어서 철강공업육성법이 제정되면서 일관제철 사업 정부 출자, 육성자금 조성, 기반 시설 지원 및 공공요금 할인 등이 지원되기 시작됐다. 이런 적극적 지원책에 힘입어 한국 철강 맏형 포스코가 1973년 최초로 일관제철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철강산업의 발전은 2차례의 오일쇼크,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심화,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수 많은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이룬 역사다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현재 우리 철강산업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인 철강수요의 둔화, 이에 따른 과잉설비 심화 우려와 보호무역주의 확대,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규제의 강화 등 대내외적 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이에 과거 한국철강 산업을 이끌었던 1세대 원로들의 도전정신과 통찰력 과감한 결단까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편집자주> 

■ 포스코, ‘박태준’으로 시작된 韓國 최초 ‘일관 제철사업’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부존자원마저 없어 일관제철소의 건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꿈과 같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을 비롯한 포스코맨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영일만에 종합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했고 잇달아 광양만에 세계 최신예 최대 제철소를 건설했다. 이를 두고 ‘영일만과 광양만의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포스코의 성공신화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경제의 밑거름이 되어 현재의 경제 대국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러한 신화의 중심에는 ‘철강왕’으로 불린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과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불굴의 개척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박 명예회장은 이후 경제인으로 변신해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어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회사를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바꾸었다. 이 같은 박 명예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대한민국 최초 종합제철소의 건설의 특명을 부여했다.

박태준

1968년 일관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자본은 물론 경험이나 기술, 자원마저 없는 상황에서 창립된 포스코의 출발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미국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등에서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그때 당시 박태준 사장은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한다는 ‘하와이구상’을 떠올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일본으로 건너가 정·재계 주요 인사들의 설득에 나섰다. 결국, 박태준 사장은 대일청구권자금 7,370만달러와 일본 은행차관 5,000만달러를 합한 1억2,370만달러를 들여올 수 있었고 19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정부가 종합제철 건설사업을 지원키로 함으로써 포항제철소 건설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1970년 4월 1일에 온 국민의 성원 속에 연산 130만톤 규모의 포항 1기 설비를 착공하게 됐고 이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했다.

지금도 포스코와 연상되는 말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철보국(製鐵報國)’과 ‘우향우’ 정신이다.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 정신은 포스코의 설립 근거다.

또한 제철소 건설에 성공하지 못할 때는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우향우정신’은 선조의 피 값이라 할 수 있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제는 민간기업으로 전환된 포스코지만,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은 건설 초기 철강역군들을 하나로 만드는 공동의 좌우명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포스코의 DNA로 각인되어 있다.

최고경영자로서 박태준 명예회장은 제철보국의 기업이념과 소명의식,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과 기술개발의 경영이념을 솔선수범의 실천으로 보여줬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고자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중점을 두었고, 이러한 책임의식이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포항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도 발전송풍설비 구조물에서 부실공사가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즉각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세아그룹. 철과 같은 마음으로 ‘이운형 회장’ 세상을 아름답게 

“철은 세상에 수 많은 헤택을 주면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겸손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철과 같은 마음이다” 故 이운형 회장은 늘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철과 같은 마음을’ 경영 철학으로 강조해왔다.

실제 신입사원들과 세아에 새롭게 합류한 경력사원들에게 항상 감사와 겸허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감사하고 우리의 협력사와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세아가 일류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했다. 경영 철학으로 결코 거창하거나 어려운 단어가 아닌 ‘감사와 겸허’의 남을 배려하는 자세를 강조한 누구보다 따뜻한 인품을 소유한 경영자가 이운형 회장이었다.

이운형 회장은 큰 조직을 이끌기 위한 강력한 리더십과 더불어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부드러운 면모로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실제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운형 회장이 평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탈 땐 직접 문을 잡아주고, 신입사원에게 “세아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귀한 손님처럼 맞이하며, 그들이 그간 겪었을 취업의 고충을 위로해 줬다. 마주치는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만나면 먼저 안부를 묻고,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현장 임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했던 그의 모습은 임직원들에게 회사에 충정을 다해 일할 수 있도록 한 커다란 동기부여가 됐다.

세아그룹

이운형 회장의 따뜻한 인품은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빛이 났다. 비즈니스에서는 이해타산 전략이 당연하지만, 이운형 회장은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협상 기술보다는 신뢰를 쌓았다.

이는 오히려 현재의 세아베스틸인 기아특수강 인수 등 규모가 큰 비즈니스에서 거래 성사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하며, 늘 강조한 ‘감사와 겸허’가 경영의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 대표적 사례다.

많은 사람들이 기아특수강(현 ‘세아베스틸’)을 회생 불가능한 기업이라고 여겼을 때, 그는 특수강 사업이 국가 기간산업에 반드시 필요하며, 철강사업자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업이라 판단하여 인수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 그의 노력으로 세아는 2003년 기아특수강을 성공적으로 인수하였으며, 인수 후에도 ‘기본과 원칙’, ‘감사와 겸허’를 지키는 경영을 고수하여 만년 적자 기업을 불과 1년만에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1996년 그룹의 사명을 부산파이프에서 ‘세아’로 바꾸면서 기업이념을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기업’으로 재정의 한 것도 이운형 회장의 따뜻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운형 회장은 세아의 가치가 곧 국가 산업과 경제 발전을 이끈다는 사명감으로 세아가 만들어 내는 철강 소재와 부품이 자동차, 조선, 항공, 기계, 발전, 에너지, 건설 등 국가 산업 전반에서 든든한 기초가 되어 철강산업은 물론, 국가 경제의 발전에 기여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업이 되길 바랬다.

 

동국제강, 뜨거운 삶의 한가운데 철강인 ‘장상태 회장’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장상태는 전자 산업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는다. 동국제강이 한다면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호의에 그는 “나는 이것저것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경영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경영자 장상태의 한 생애를 요약할 때 꼭 나오는 ‘철강인’이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단호한 태도에서 비롯됐다.

그는 탐구적 집념과 오랜 철강공장 운영 경험을 통해 해박하고도 깊은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끊임없는 노력과 통찰력으로 동국제강을 대표적인 철강회사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그의 소신이 추상같았던 권력의 핵 박정희 대통령의 제의에도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다.

부산에서 큰 기틀을 다지고 마산의 한국철강을 인수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그다음이 인천항을 주요 기점으로 하는 기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72년 한국강업을 인수하며 그 꿈은 이뤄진다. 한국강업 인수 후 전기로 2대를 설치하고 인천공장 전기로 기술자를 3개월 동안 부산제강소에 파견해 기술을 익히게 했다. 그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할 경우 야단도 많이 쳤는데 이것은 멋진 공장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욕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난 후 마음이 편치 않아 따뜻한 말로 다독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국제강

‘세계적인 철강 공장을 우리가 만들어 운영하자’는 그의 의지는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 품었다. 드디어 큰 걸음을 내디딜 기회가 찾아왔다. 1990년 6월 1후판 공장 준공을 계기로 인천공장의 다음 단계를 계획한다. 그 계획이 1991년 1월 인천 제2공장 건설이다. 인천 기존 공장 4만 평 부지에 연산 65만 톤 규모의 직류 전기로 공장과 50만 톤 규모의 철근 생산 공장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동국제강 역사를 말할 때 포항제강소 건설의 의미는 매우 크다. 포항제강소 건설은 장상태의 비전이 현실 속에 뿌리내리게 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건설의 역사는 그에게 있어 여러 해 동안 부하 장수들을 독려하며, 큰 싸움을 승리로 마무리 지은 큰 전쟁이기도 했다. 그 전쟁의 승리는 장상태 한 사람 승리가 아니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승리의 기쁨과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장상태 자신의 표현처럼 1후판 공장 준공은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생산체계가 본격화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적극적 출발의 의미가 있었다. 동국제강은 포항 시대를 열며 거듭 태어났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포항제강소가 완공됐을 때 그는 극적이고 통 큰 지시를 한다.

“그동안 우리 동국 사람들은 이 공장을 짓는 일에 힘과 정열과 지혜를 쏟아부은 기라. 우째 한두 사람의 수고로 될 수 있는 일이고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쳤다. 본사고, 공장이고, 모든 임직원의 이름을 비석에 새겨 우리의 기쁨과 영광을 함께 하는 기라.” 그리하여 마침내 ‘동국제강이여 영원하라’ 라는 유명한 명문 기념 비석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