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 두기와 살생부

사회적 거리 두기와 살생부

  • 철강
  • 승인 2020.04.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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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박진철 기자 jcpark@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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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좋아한 선배가 있다. 대학 근처 자신의 자취집을 ‘용군장’이라는 이름으로 대학 선후배, 동기들에게 365일 개방했던,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후덕한 사람이다.

전날도 용군장에서 술을 마신 뒤 깨어났던 한 나른한 오전이었다. 볕이 드는 창가에서 선배가 휴대폰 버튼을 쉬지 않고 누르고 있었다. 무엇을 하나 봤더니 연락처를 정리하고 있었다. 당시 휴대폰은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아니어서 연락처 저장용량에 제한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200개 정도였지 않나 싶다.

선배는 말했다. 주기적으로 휴대폰에서 없앨 이름을 없애면서 관리하고 있다고. 연락이 너무 뜸해져서 서먹서먹해진 중고등학교 친구들, 이제는 연락할 수 없는 곳으로 간 사람들, 연락을 하고 싶지만 바뀐 연락처를 알 수 없는 사람들, 과사무실에서 조교로 일하던 선배가 업무 등의 이유로 저장했던 사람들…. 이런저런 이유로 주기적으로 연락처를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배는 휴대폰 연락처 정리가 일종의 '살생부’를 쓰는 느낌이라고 했다. 생활 속에서 ‘쓸모’가 없어진 사람을 지우고, 새로운 쓸모가 생긴 사람을 채우는 일이 섬뜩한 느낌의 살생부를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대면 공동체 속에서 사회적 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데 한계가 되는 숫자가 150명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150명이라는 숫자는 신석기시대 수렵 채집 공동체 인구이기도 했고, 전통적인 시골 마을의 평균 인구이기도 했다. 또 150명은 내일까지 갚을 테니 돈 만 원만 빌려달라고 부탁해 볼 수 있는 지인의 평균 숫자라고도 한다. 

옥스퍼드 대학교 진화 심리학자 로빈 던파는 인간의 두뇌가 감당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인간 관계의 최대치가 150명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일상에서 그만큼 우리가 감정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지인의 숫자는 한정돼 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이다. 회사마다 집집마다 대면 접촉을 꺼리고 바깥출입을 금하고 있다. 이럴 때 휴대폰이나 이메일 등 연락처 정리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섬뜩한 살생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쁘고 생각 없이 영위했던 삶에서 정말 힘이 되는 사람, 잘 지낼까 걱정이 되는 사람, 무슨 일이든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 떠올리기만 해도 함께한 추억에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 들을 한번 정리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뿐 그동안 바빠서 챙기지 못했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번 참에 따뜻한 안부 인사를 한번 건네보자. 

“오랜만입니다. 마음뿐이지만 항상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안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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