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특집) 집념의 외길 인생 석천 홍종열(上)

(추모특집) 집념의 외길 인생 석천 홍종열(上)

  • 철강
  • 승인 2020.08.0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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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황병성 bshwang@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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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업 자재 중 그의 시선 사로잡은 ‘와이어로프’
1955년 와이어로프 국산화 도전 결심

2019년 7월 15일 비보(悲報)가 전해졌다.고려제강 홍종열 명예회장이 별세했다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소식이었다. 
우리 업계는 그를 원칙을 지키며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어른으로 기억한다. 고인이 세상에 남긴 업적이 너무 크고 위대하기에 보내는 슬픔 또한 컸다. 추모 1주년을 맞아 숭고했던 고인의 삶을 다시 회고한다. ‘내려놓은 삶’과 ‘사회에 기여하는 삶’에 모범을 보인 고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애잔한 추모의 정이 저절로 넘쳐난다. 고인의 세상에 남긴 발자취를 두 번에 걸쳐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 경영 인생의 시작 
석천 홍종열 고려제강 명예회장은 1918년 10월 23일 경남 창원시 진동면 진동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홍재구(洪在求) 공과 모친 강도분(姜都分) 여사 슬하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이때 익힌 신의(信義)와 근검절약 정신은 그가 장성한 후 생활 철칙이 됐고, 경영활동 주요 덕목이 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그의 경영 인생이 새롭게 시작됐다. 9월 22일 ‘고려상사(高麗商社)’를 창립했다. 국내에서 채취한 수산물을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각종 선구용품과 수산업 자재 등을 수입해 부산 등지에 판매하는 것이 주업이었다. 특히 석유류와 카바이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갔던 다데이시산업 근무 경험이 큰 자산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바이드 판매는 전국 최대를 자랑할 정도로 성장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석천은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제품에 주목한다. 자사가 취급 중이던 수산업 자재 중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와이어로프’였다. 어업용 도구로서의 단순한 수요를 넘어 와이어로프가 지닌 잠재적 활용도를 발견한 것이다. 각종 산업분야 중요한 기초 재로서의 가능성이 눈에 들어왔다. 

1955년 그는 와이어로프 국산화 도전을 결심한다. 산업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급박했던 당시, 국가적 현안을 보더라도 바람직한 것이었다. 1958년 와이어로프 공장 설립을 위한 구체적 사업 계획이 가시화 됐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각종 정보를 바탕으로 월 생산 1천 톤 규모의 공장을 구상한다. 
  
■ 고려제강소설립   
1961년 1월 ‘고려제강소’를 설립하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와이어로프 생산 첫발을 내디뎠다. 우선 첫 단계로 월 생산 50톤 규모의 와이어로프 연선 생산을 시작했다. 일본 기술자의 도움이 컸다. 1961년 3월 마침내 시제품인 4호 품(직경 12㎜, 길이 200m)이 탄생했다. 석천의 선재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제품 설명회에 참석한 상인들은 품질을 확인하고 일본산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며 놀라워했다. ‘노란 띠 코끼리 표’의 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생산 제품이 품질을 인정받으며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특히 국영 공사와 어업 현장에서 각광 받았다. 이들 국영 공사 납품을 통해 명성과 이익을 동시에 확보했다. 전국 어항(漁港) 선주들 사이에서도 제품의 우수성이 입소문을 타며 사용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1962년 6월에는 베트남으로 첫 수출하기에 이른다. ‘KISWIRE’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첫 걸음이었다. 그 후 품질을 인정받고 주문이 늘어나면서 1963년 11월 8일 월 생산 1천 톤 규모의 수영공장을 건설한다.  

■ 고려제강주식회사 사명 변경 
일제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으로 온 국토가 피폐했던 시절 석천은 황무지 위에 이렇게 길을 열었다. 작은 선구용품 판매에서 시작해 무역업으로 사업을 키웠고, 그는 ‘선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에 평생을 걸었다. ‘한 우물을 파라’는 것은 그의 지론이자 주위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말이었다. 제 갈 길만 묵묵히 가는 것이야말로 기업 전문화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몸으로 체득하고 스스로 실천했던 것이다. 

1962년 베트남 수출에 이어 1963년 동남아, 1965년에는 미주지역으로까지 수출을 확대했다. 이렇게 수출이 활성화 되자 석천은 해외시장 진출 의지를 더욱 가속화하고 적극성을 띠었다. 수출 방식도 바꿔 대량 수출 기반을 마련했다. 외국 종합상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시장을 개척해 1969년 벨기에 수출이 성사되며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69년 8월 20일 이미지 쇄신을 위해 사명(社名)을 변경했다. 새 이름은 ‘고려제강주식회사(高麗製鋼株式會社)’였다. 특수선재 제조업체로서의 본격적인 위상과 자부심을 담은 의지의 표상이었다. 이어 1970년에는 수영공장 월 생산 1천 톤을 달성하며 그의 10여 년 노력이 알찬 열매를 맺었다. 세계적인 특수선재 전문기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6년 부산역 앞에서 ‘전국 우수공산품 전시회’가 열렸다. 사진은 당시 고려제강소 제품 전시장
1966년 부산역 앞에서 ‘전국 우수공산품 전시회’가 열렸다. 사진은 당시 고려제강소 제품 전시장

 

■ 해외 시장 개척과 경영 안정화 노력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해외지사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세계 시장을 상대로 판매를 확대하려면 지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62년 첫 수출 이후 수출의 중요성을 늘 잊지 않았다. 노력이 뒤따랐다. 10년간 고려제강의 수출은 1,200배나 신장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해 1971년 정부는 대통령 감사장과 함께 석탑산업훈장을 하사하며 격려했다.  

그는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신념을 늘 최우선에 놓았다. 모든 임직원이 하나 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기업인으로서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영 여건이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인원을 감축하지 않았다. 평생직장,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그가 직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 1977년 12월 한국생산성본부가 선정하는 한국의 10대 기업에 올랐다. 창업 이래 창의와 신뢰, 인내와 내실을 근간으로 건실한 재무구조, 우수한 제품 생산, 적극적인 시장 개척 등을 펼쳐왔다. 1970년대에 얻은 대내외적인 성과는 이러한 의지와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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