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에 쓰이는 철강재인 냉연도금강판 가격을 둘러싸고 철강사와 가전사 간 샅바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가전업계가 가격 인하 쪽에 무게를 실으면서 철강업계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29일 철강업계의 얘기를 종합하면, 철강사와 가전사 간 가전용 냉연도금강판 거래가격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들은 분기별로 네 차례에 걸쳐 가격 협상을 한다. 통상 가격협상은 각업체들간 비공개로 이뤄진다. 올해 1분기 협상에서 선발주자인 포스코와 가전사들과 톤당 9만원 인상을 요구했지만 가전사들은 가격 인하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철강업계는 철광석 등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을 고려해 냉연도금강판 가격도 올라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지난 3분기 톤당 7만원, 4분기 동결로 가격 대응을 해줬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인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29일 한국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지난 26일 철광석 가격은 톤당 133.67달러로 일년 전에 비해 9.3% 상승했다. 지난해 3분기 가격 인하가 있었던 7월(111.38달러)과 9월(115.72달러) 비교하면 각각 20%, 15.5% 올랐다. 또 올해 들어 철광석 가격이 톤당 130~140달러 대로 높은 수준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과 지난 11월부터는 인상된 산업용 전기 요금 등은 철강사에 원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방 산업의 부진에 따른 수요 감소로 실적 회복에 부침이 있는 상태다. 곧 다가오는 분기 실적 발표에서 부진한 실적을 공개해야하는 제조사들도 있을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가전업계도 마찬가지다. 경기침체로 인한 수요가 위축되면서 실적에도 충격을 받고 있어서다. LG전자는 최근 공시를 통해 지난해 4분기 매출액 23조1041억원, 영업이익 3131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특히 영업이익은 증권사 전망치였던 6394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실적이다. H&A(생활가전)사업과 HE(TV)사업본부 에서 각각 1156억원 722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해 적자 전환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전년 동기 대비 35% 급감한 2조8000억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냉연도금강판을 놓고 철강사와 가전사의 가격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가전용 강판에서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진 철강업계 입장에서는 판매 가격 회복이 절실한 상황이다. 지난해 포스코는 글로벌 가전 시장의 성장 정체와 제품의 공급 과잉, 대체재 증가 등에 따른 가동률 저하로 전기아연도금강판 생산설비인 2EGL라인을 폐쇄하기도 했다. 생활가전 등의 측면과 외관을 꾸며주는 냉간단압밀 시장의 경우는 가격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어서 업체별 수익성은 판매 확대에 비해 저조한 수준을 보였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가전업계도 유례없는 불황을 맞닥들이면서 쉽게 양보할 의사가 없어보인다. 엔데믹을 기점으로 가전 대기업들의 생활가전의 부진이 지속되고 있고, 오텍(캐리어)와 위닉스 등 전통적인 중견 가전기업들도 최근 적자를 기록한 상태기 때문이다. 대유위니아그룹의 구조 조정과 함께 SK매직은 경동나비엔에 주방가전 제품 3종 사업을 매각하기도 했다. 또 최근 들어 철광석 등 주요 원료 가격이 하락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큰 폭의 가격 인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올해 1분기 업계 간 입장 차로 협상이 지연될 가능성도 높다"며 "양측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격 인상이 추진되겠지만, 현재 타이트한 공급 상황과 국내 가전용 강판에 대한 프리미엄, 장기간 낮은 가격에 가전용 강판을 공급해온 철강사에게는 분명 유리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