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게가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 주인 잃은 슬픔이턱에 차오른다. 아버지는 가고 없지만 자식들은 지게를 매정하게 버릴 수 없었다. 생전의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그 지게에 의지하며 자식들을 키웠고 가정을 평안하게 이끌었다. 새벽이 되면 지게를 지고 일을 나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무수한 가정의 애환을 지고 날랐던 나날은 혹독하고 길었다. 그렇게 엄혹한 질곡의 세월을 불평 한마디 없이 건너온 당신은 지금 없다. 이 땅에서 의무를 다하고 하늘로 가셨기 때문이다. 평생 동반자였던 지게는 유일한 아버지의 유물이다.
돌돌 아픈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어머니의 재봉틀이 구석 한쪽에서 외롭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재봉틀을 놓으신 지 오래 됐다. 긴 밤을 쉬지 않고 하염없이 돌리며 옷을 기워 입던 시절도 옛날 얘기가 되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옷을 쉽게 사 입을 수 없었다. 떨어지거나 해진 옷은 재봉틀로 수선해서 입었다. 그래서 재봉틀은 가난의 대명사와 같았다. 이렇듯 가정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던 재봉틀도 의무를 마친지 오래다. 마음만 먹으면 좋아하는 옷을 사 입을 정도로 형편이 넉넉해졌기 때문이다. 이 또한 유물로 존재할 상황에 처했다.
오래된 것에는 가치가 깃들어 있다. 그것을 마땅히 이어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대교체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오래된 것을 모두 낡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낡았다 하여 흔적을 없애려는 것도 잘못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가 재발견되고 소중한 교훈으로 재탄생 한다. 박물관에서 우리는 이것을 실감한다. 누군가의 손에서 애지중지 쓰이던 물건은 물론이고, 나라에서 소중하게 취급하던 물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물건들을 보며 옛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하고, 물건에 깃든 사연을 유추하기위해 애쓴다.
낡은 것에 대한 소중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세월의 무게를 지닌 가치는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세월의 수레바퀴는 순탄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때로는 거친 풍파에 좌절하고, 모진 세파에 부닥쳐 힘겹다. 세월의 가치는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존중받는다. 포스코 1 제강공장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설립 후 50년을 넘긴 이 공장은 자사 DNA가 고스란히 투영됐다. 구성원들의 자존심과 같았던 공장은 자사는 물론이고 국가 기간산업 발전의 든든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
지금 와 새삼 회자하는 것은 불꽃같이 살았던 당시 구성원들의 투철한 사명감을 잊지 못해서이다. 이 공장은 제1 고로에서 쇳물인 쏟아졌던 1973년 6월 9일보다 6일 늦은 6월 15일 가동됐다. 그러나 불과 4년도 지나지 않은 1977년 4월 24일 전로에서 130여 톤의 쇳물이 쏟아지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기술 지원에 나섰던 일본 전문가조차도 복구에 최소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회사는 생존의 갈림길에 섰다. 이때 전 직원은 머리를 삭발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혼신의 노력 끝에 불과 1개월 만에 복구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당시 현장에서 헌신했던 사람들은 포스코를 떠났지만 그들이 보여준 열정과 노력은 전설로 남았다. 그 전설은 45년 뒤인 2022년 9월 부활해 힌남노 태풍 피해 복구라는 기적의 역사를 다시 쓴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사건이었다. 공장은 작았지만 1 제강 공장 출신이 2, 3 제강공장을 세웠고, 광양제철소도 세우는 금자탑을 쌓았다. 1 제강공장에서 길러낸 수많은 인재들과 제강 신기술이 회사 발전의 초석이 됐다. 모든 것이 자부심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기술 개발과 구성원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1 제강 공장이 역할을 다하고 문을 닫는다. 그동안 몇 번의 위기를 잘 넘겼지만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아버지의 지게와 어머니의 재봉틀이 역할을 다한 후 느낌처럼 문을 닫는 섭섭함이 크다. 당시 몸담았던 구성원들의 아쉬움도 클 것이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당당했던 1 제강 공장의 가치는 없어지지 않고 길이 남는다. 구성원들의 불꽃 같은 삶과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가치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제 그 소중한 가치를 이어가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 됐다. 그래서 잊히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역사로 승화(昇華)시켜야 하는 사명감이 따른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오늘도 힘겹게 돌아가는 것은 가치에 충실하기 위한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이다. 회사의 성장·발전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옛것이 소중한 것이고, 미래 희망을 싹 틔우는 씨앗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