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목(面目)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부끄러워 남을 대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이다. 어떤 잘못으로 난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면목(面目) 없습니다”라고 한다. 도저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는 반성의 의미를 담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 이 말은 고사성어(故事成語)에서 유래됐다. 한(韓)나라 유방과 초(楚)나라 항우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를 때이다. 이 싸움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처한 항우가 기마병을 이끌고 장강(長江) 북쪽 기슭에 도착하여 동쪽 오강(烏江)을 건너려고 하였다. 마침 오강의 정장(亭長)이 항우를 기다리고 있다가 말한다.
“강동(江東)이 비록 작으나 땅이 사방 천리요, 백성들의 수가 수십만에 이르니 그곳 또한 족히 왕이 되실 만한 곳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빨리 강을 건너십시오. 지금 신에게만 배가 있어 한나라 군사가 이곳에 온다고 해도 강을 건널 수 없을 것이 옵니다.”
그 말에 항우가 웃으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건너서 무얼 하겠나? 또한 내가 강동의 젊은이 8천여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거늘 설사 강동의 부모 형제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추대한다고 한들 내가 무슨 면목(面目)으로 그들을 대하겠나? 설사 그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의 양심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정장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장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자신의 천리마를 주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한나라 군사들과 싸우다 마지막에는 자결한다. 항우는 부끄러움을 아는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 했다면 세인들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쓰면서 항우를 본기(本記)에 넣은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면목(面目)이 없다는 말은 세월이 흘렀다 하여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다. 이 말이 태생된 이유는 잘 몰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두 번씩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몰라도 적어도 얼굴을 들지 못한 정도로 부끄러운 행동을 한 후이었을 것이다.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면 당연히 반성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큰 잘못을 해 놓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도저히 얼굴을 들지 못할 일을 저질렀는데도 반성은커녕 얼굴을 곧추세우고 활보한다. 뻔뻔함이 도를 넘었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사리 분별이 없어지고 있다고 해도 정의는 아직 우리 곁에 살아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서 과오(過誤)가사라지지 않는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당연히 면목(面目)이 없는 것이 맞다. 잘못을 책임지고 자리에서 내려와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옳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직장에서 그렇고, 사회에서 그렇고, 정치권에서도 그렇다. 특히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 지도층이 문제의 근원이니 국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크다.
최근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는 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접하며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필자도 자식을 공부시키고 있다. 입시의 문턱을 넘은 아이도 있고, 이제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도 있다. 상상을 초월한 사교육비에 부모의 허리는 휜다. 자고 일어나면 공부가 전부인 아이가 지옥과 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에 참고 견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입시의 문턱을 넘고 새롭게 취직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아이가 말했다. “성적이 좋지 않아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대학원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왜 그런 위치에 있지 못하느냐는 원망처럼 들렸다. 더불어 두 아이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특혜가 판을 치는 사회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경쟁의식과 희망찬 미래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면목(面目)이 없어서 왕의 자리도 과감히 포기한 항우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자기가 한 잘못을 책임지고 차라리 대의를 포기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더구나 법의 집행자를 관리하는 수장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스스로 정도가 아닌 편법을 저지른 사람이 검찰과 사법부를 개혁 한다고 하면 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정도(正道)가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