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사람 모른 채 못하는 것이 그의 천성”
세아제강 그룹 고(故) 이운형 회장이 영면에 들어간 지도 어언 7년을 맞는다. 그의 죽음을 평범한 한 인간의 죽음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긴 발자취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이다. 국내 철강 산업의 발전은 물론 문화예술 지원 등 사회적 책임까지 솔선수범했던 생전 그의 삶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특히 26년 전 본지 창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기억이 있기에 다섯 번에 걸쳐 지면을 할애하고자 한다. 그가 떠난 후 2018년 ‘철과 같은 마음으로’의 헌정책이 출간됐다.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책을 바탕으로 생전의 삶을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 소년에서 청년으로
이종덕과 박월선 부부는 2남 4녀의 자식을 낳았다. 부부에게 가장 기뻤던 것은 딸만 셋이던 집안에 첫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가 이운형이었다. 운형의 유년 시절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해동공업사가 놀이터였다. 두 살 아래인 남동생(현 이순형 회장)과 함께 시커먼 철재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가장 흔했던 것이 철이었으니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으로 철과 친숙했다.
소년은 초등학교에 다니며 모든 과목을 ‘수’를 맞을 정도로 머리가 영특했다. 머리가 좋은 것은 집안 내력이었다. 백부와 숙부는 어려운 시절에도 일본에서 유학했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이운형도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가 공대를 선택한 것은 부친의 사업을 고려해 생산 라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자형의 권유 때문이었다. 예술 분야에 대한 자신의 관심도 반영됐다.
대학에서 리더의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ROTC(학군단)에 지원한다. 3·4학년 동안 훈련을 통해 동기들과 가까워진다. 동기들은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지낸 이상곤, 삼성경제연구소장을 지낸 정구현 등이다.
특히 학창 시절 그의 평판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타인을 평가하는 말은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운형은 학사 장교로 군 생활을 마친 후 대학 때부터 사귄 박의숙과 결혼한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미팅 때였다. 이화여대 불문과에 다니던 같은 학년이었다. 이운형은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박의숙은 거침없고, 자유분방했다. 그런 기질 차이가 오히려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호기심을 갖게 했다. 결혼한 후 그는 미국 미시간대학교로 유학을 간다. MBA 과정을 마친 후 귀국해서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에 이사급으로 입사한다.
■ 사람의 향기
배려란 원래 일상에서 베푸는 작은 친절이나 양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사소한 배려에 감동하는 것은 관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운형을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그의 남다른 배려심이다. 그런데 그 배려의 대부분은 딱히 일화라고 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저녁 모임 자리가 길어질 것 같으면 대기하는 기사에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고 한다. 기사가 어쩌다 집안일이 있어 아침에 늦을 것 같다고 하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나오라고 하고 자신은 택시로 출근했다고 한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 데려다준 기사에게 자기 차를 타고 퇴근하라고 했다. 한번은 기사가 미안한 마음에 머뭇거리자 차 열쇠를 손에 쥐여주고는 그가 차에 올라 멀어질 때까지 대문 앞에서 지켜보더라는 것이다. 직무의 상하 관계나 갑을 관계로 만난 사이에서도 그의 배려는 남달랐다.
“언제가 이 회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때 자기가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낌없이 돕고 싶다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온 말인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대학 선배인 전(前) 포스코 이구택 회장의 말이다. 그는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모른 채를 못 했다. 그의 천성이었다. 사실 주변에서 이런저런 부탁이 많았다. 큰 고충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고자 했다. 타인의 처지인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으로 감정 이입이 된 것이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운형의 유일한 단점이 거절을 못 하는 것이라고 했을까. 어쩌면 그것이 큰 장점일 수도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서 나눈 사소한 말까지 기억했고, 그 이야기가 무엇이든 그 안에서 자신이 상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고 한다. 어느 지인은 “내가 저 사람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분명 바쁜 사람인데 매일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헤아렸다.”고 말했다.
그의 너덜너덜한 수첩은 매우 유명했다. 그는 작은 수첩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일상의 모든 것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지인들의 기념일이나 꼭 가봐야 할 행사 일정, 만나서 나눈 주요 대화, 술자리에서 부른 노래나 골프를 칠 때 멤버들이 낸 각각의 점수까지 그가 만난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적었다. 이 수첩에는 관계 맺음에 있어 누구에게도, 어떤 일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내 행사나 오페라 공연 등 회사 임원들이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자리가 있으면 그는 꼭 부인들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남편의 상사라면 아내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마치 친구 부인이라도 만난 듯 소탈하게 말을 걸어오자 감동한 것이다. 격의 없는 대화로 나중에는 임원들의 아내가 먼저 다가갔다고 한다.
대원문화재단 김일곤 이사장은 “내가 이운형 회장보다 나이가 많은데 가끔은 내가 동생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고 말했다. 무슨 말이든 꺼낼 수 있게 진심으로 경청하는 모습에서 문득 손윗사람 같은 푸근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운형 회장이 떠난 후 백 일째 되는 날 자비로 추모 음악회를 열었다. 추모 음악회는 국가적인 영웅이나 위대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장은 그냥 보내기가 안타까워 마음이 저절로 움직였다고 술회 했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