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광풍이 세상을 온통 비정상 속으로 몰아넣었다. 순리대로 움직이던 우리의 일상은 변칙적으로 바뀌었고, 바이러스 공포 앞에서는 그것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 우주로 탐사선을 보낼 만큼 과학이 발달했지만, 한갓 바이러스 앞에 맥을 못 추는 나약함을 보며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오만한 삶을 살아왔는지 반성하게 한다. 더불어 이 난제 극복이 국민적 과제가 된 현실 앞에서 이기주의의 민낯과 상생(相生)의 숭고함을 함께 발견한다. 씁쓸함과 존경스러운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비와 바람이 부는 자연적인 현상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다. 코로나 사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복(福)과 화(禍)는 인간의 힘으로 충분히 조율할 수 있다. 화가 된 코로나를 어떻게 복으로 바꿀 것인가가 최대 관건이다. 이것은 국민적인 합의와 행동이 동반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나만 살겠다는 이기주의로는 절대 안 된다. 서로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발현하는 상생의 노력이 화를 복으로 바꾸는 최고 힘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도덕경 상편 제2장을 보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있고 없음이 함께 공존하는 대화합을 강조한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데 급급한 현대인들이 되새겨보아야 할 경구다. 상생의 원리는 갈등과 대립을 화합으로 전환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에 기업들은 요즘 유난히 상생을 강조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상생의 순수함을 가장한 이면의 얼굴에 대한 실망이 크다.
옛날 어떤 사람이 “우리 동네에 솥이 하나 있는데 그 솥에다 떡을 하면 세 사람이 먹기에는 부족하지만 천 명이 먹으면 남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그 질문에 아무도 답을 못했다. 그러자 질문을 던진 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다투면 모자라고, 양보하기 때문에 남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상생의 힘이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는 상생의 힘이 산술적인 계산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까지 해결한 것이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본성에는 연민과 공감의 원리가 있다. 인간은 이런 본성을 바탕으로 사회 질서를 형성한다”라고 했다. 코로나 사태에서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어김없이 확인됐다. 다소 형편이 나은 기업들은 피해자와 피해지역을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다퉈 성금을 내고, 회사 연수원을 감염자 치료 병동으로 내놓으며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고 있다. 전국에는 건물주들이 곤경에 빠진 자영업자 임대료 깎아주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반면 나와 무관한 듯 이기주의적인 행태를 취하는 대기업도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을의 입장인 중소 업체에 전가된다. 납품단가 인하 요구, 원가절감을 이유로 비용 줄이기 등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등장한다. 어려운 것은 중소업체가 더한 데도 결국 희생양이 된다. 벌써 휴업을 신청한 중소업체가 1만2,000여 곳이 된다는 것이 이것을 입증한다. 지금은 콩 한 쪽도 나눠 먹던 옛 선조들의 지혜와 인심이 필요한 때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장기적인 파트너십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서로 ‘내가 저 회사를 위해 무엇을 도와줄까?’ 하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상대방의 어려움은 헤아리지 않고 수시로 목을 옥죄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 그래 놓고 상생을 입버릇처럼 외친다는 것은 위선을 가장한 이중적 얼굴이다. 나의 성공이 파트너의 성공으로 이어지게 하고, 고통이 있다면 서로 분담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약자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고통은 파트너 관계도 아니고 상생의 의미에도 배치된다.
우리 업계도 무척 어렵다. 본지도 코로나 극복에 도움을 주고자 관련 국가정책을 실시간으로 안내하고, 업체의 구인, 설비 및 사업장(부동산) 매각 공고를 무료로 게재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니 구독료 받기가 미안하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이해하며 구독을 연장해 주는 고마운 애독자들도 많다. 반면 비용 절감을 이유로 광고를 줄이려는 큰 업체들을 보면 유감스러운 생각이다. 동업자였고, 파트너로 함께 한 소중했던 지난날이 있었다. 그 소중함이 실망으로 바뀌지 않게 상생의 큰 의미를 저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