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한 선생이 담임을 맡자마자 저축하기를 유난히 강조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용돈을 아껴 저축하는 것을 학교마다 권장했다. 일찍 저축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강제성은 없었다. 그런데도 담임은 저축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학생의 형편을 따져보지도 않고 의무적으로 저축하기를 강요했다. 저축을 위한 돈은 담임을 통해 은행으로 입금하는 시스템이었다. 이에 학생들은 형편이 되지 못해도 담임의 강압에 못 이겨 빌려서라도 저축을 해야 했다.
1년이 끝나가자 담임이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났다. 영전(榮轉)이었다. 학생들은 꽃다발을 전하며 축하했다. 이별의 아쉬움과 스승에 대한 도리를 지키기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던 중 사고가 터졌다. 담임이 학생들의 저금을 유용한 것이 들통난 것이다. 담임에 맡겨 놓은 통장을 돌려받는 순간 저축한 돈과 잔고가 맞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돈을 변제받으며 불미스러운 사건은 무마됐지만 그 스승에 대한 씁쓸한 기억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날은 선생의 노고와 은혜에 감사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이날은 충남 논산시 강경여중고 RYC 단원들이 1958년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선생을 위문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유래가 됐다. 1965년에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을 진정한 국민의 스승이라고 여겨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 이처럼 좋은 취지의 스승의 날도 극심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
촌지와 체벌, 교육비리가 판을 치자 1973년 정부가 스승의 날을 폐지했다. 치맛바람에 편승한 촌지문화가 교육환경을 크게 오염시켰다. 과도한 사은행사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작용이 많았다. 이 같은 문제로 스승의 날은 폐지 됐지만 교권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에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 조성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1982년 부활했다.
이 부침의 책임은 오롯이 선생과 학부모에게 있었다. 학생들의 저금을 유용한 선생처럼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존경심을 스스로 발로 걷어찬 스승이 많았다. 촌지문화는 교육환경을 악화시키는 최고 주범이었다.
회사에도 스승과 제자와 같은 관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사수와 조수관계가 그렇다. 변화가 거의 없거나 더뎠던 시절에는 선배 사원이 직장에서 존경받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지식과 정보, 경험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회사 또한 이들의 경험과 전문성에 크게 의존했다. 특히 기술직 사원들은 이러한 관계가 뿌리 깊게 고착화 됐다. 그래서 아래 직원들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수를 스승처럼 받들며 모셔야 했다. 그러나 이들도 관계가 좋으면 상생의 콧노래를 부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갈등의 깊은 골로 불편했다. 시대가 급변한 현대에 와서는 이 스승의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신기술이 도입되고 경제 환경이 빠르게 변하며 새로운 유형의 시장과 고객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기성세대는 과거 지식과 경험에 의지하기보다 새로운 배움이 필요한 현실에 직면했다. 특히 코로나 펜데믹으로 새 협업과 소통의 법칙이 등장하면서 적응이 시급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선배 직원들은 활용법을 배우고, 다른 유형의 소비자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 가르침을 후배들이 담당했다. 스승과 제자의 위치가 역전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더불어 선배의 권위와 위엄도 위협받았다.
우리 속담에는 ‘팔십 노인도 세 살 먹은 아이한테 배울 것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현 상황과 맞는 얘기인 것 같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참 명제라면 까마득한 후배에게도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조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것을 보면 영원한 스승도, 제자도 없다는 말이 일리가 있다. 학창 시절 실망 속에서도 존경했던 참 스승이 있었던 것처럼 직장도 마찬가지다. 가끔 눈에서 감동의 눈물을 뚝뚝 떨어지게 만들었던 스승 같은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를 만나 카네이션 한 송이로 존경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대폿잔을 기울이며 옛 추억을 떠올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드는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