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이라 불린 박태준 명예회장

‘철인’이라 불린 박태준 명예회장

  • 철강
  • 승인 2011.12.1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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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방정환 jhbang@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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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강업계 위대한 발자취 …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기업이념 실천
우리나라 산업기반 마련, 포스코의 기술 리더십 원동력 확보 힘써

▲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향년 84세의 나이로 13일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선구자이며 세계적 철강전문가이다. 철강왕이라 불린 미국의 카네기가 생애에 조강 1,000만톤 생산체제를 구축한 데 그쳤으나 박태준 명예회장은 창업 당대에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아울러 2,100만톤 생산체제를 구축하여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좌우명에 걸맞게 조국이 위태로울 때는 전장에서, 국가 경제가 필요로 할 때는 산업현장에 몸을 던졌다. 포스코 역사 40년 중 26년을 최고경영자로 일하는 동안 우리나라를 세계 최고 철강국가의 반열에 끌어올린 박태준 명예회장은 외국 5개 유수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우리나라에서 훈장 7개, 외국에서 훈장 10개를 받았으며, 특히 1987년에는 철강의 노벨상인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했다.
 
 1978년 중국의 최고실력자 등소평은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반문을 들어야 했고, 이를 계기로 한동안 중국에서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실제 박태준 명예회장은 1992년 중국 수도강철의 명예고문으로 위촉됐으며, 현재도 중국정부의 중국발전연구기금회 고문으로 위촉돼 있다.
 
 ◇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대들보
 
 박태준 명예회장은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만성적자 상태에 있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만들어 놓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 소임을 부여받았다.
 
 1968년 일관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자본은 물론 경험이나 기술, 자원마저 없는 상황에서 창립된 포스코의 출발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미국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과 IBRD(세계은행), USAID(미국국제개발처), IECOK(대한국제경제협의체) 등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우리나라 일관제철소 건설 계획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그때 박태준 사장이 미국을 방문하여 KISA 대표와의 담판을 통해‘협력불가’를 최종 확인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하자는 이른 바‘하와이구상’를 떠올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된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박태준 사장은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축적된 인맥을 활용하면서 일본 정·재계 주요 인사들의 설득에 나섰다.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가 당시 상황에 대해 “박 선생은 보는 이들이 오히려 안타까워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의 진지한 노력에 일본은 감동했다”고 회고록에 썼을 정도다.
 
 박태준 사장은 결국 대일청구권자금 7,370만 달러와 일본 은행차관 5,000만 달러를 합한 1억2,370만 달러를 들여올 길을 뚫었으며, 19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정부가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사업을 지원키로 함으로써 포항제철소 건설을 본격화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1970년 4월 1일, 온 국민의 성원 속에 조강연산 130만톤 규모의 포항 1기 설비를 착공하고,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에서 최초의 쇳물을 생산하게 된다. 이후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는 가운데 세계 최대 제철소라는 타이틀을 번갈아 획득하면서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완공, 1992년 2,100만 톤의 4반 세기 대역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설비가동 첫해인 1973년 매출액 416억원에 당기순이익 46억원을 기록한 이래 1992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매출액 149배(6조1,821억원), 순이익 40배(1,852억원) 이상으로 늘렸으며, 이것은 설비가동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흑자행진을 지속하는 기틀이 되었다.
 
 ◇ ’製鐵報國’의 기업이념 실천으로 국가경쟁력 기틀 마련
   
 최고경영자로서 박태준 명예회장은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기업이념과 소명의식,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과 기술개발의 경영이념을 솔선수범의 실천으로 보여줬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도 뜰 수 없는 공사현장을 둘러본 박정희 대통령이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과연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근심할 정도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박태준 사장은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임직원들에게 선조의 피와 땀으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할 경우는 ‘우향우’하여 동해에 몸을 던지자고 외쳤다.
 
 기초공사를 진행하면서 향후 조업에 필요한 철광석과 원료탄을 구매하고자 제철소 부지에 ‘제선공장’, ‘제강공장’, ‘열연공장’이라고 큼직하게 쓴 표지판 사진만 들고 호주의 세계적 광산회사들을 직접 찾아가 소량 구매에도 불구하고 대량 구매하는 일본과 동일조건으로 원료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사무직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공사현장에 투입시켜 기어이 공기를 만회하였으며, 외국의 다른 회사들이 통상 4~5년 만에 완공한 제철소를 3년 만에 완공하여 톤당 생산원가를 낮춤으로써 국제경쟁력의 원천을 마련했다.
 
 또한, 박태준 사장은 회사를 경영하면서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고자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중점을 두었고, 이러한 책임의식이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포항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도 발전송풍설비 구조물에서 부실공사가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는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즉각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제철소를 건설하는 동안에도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으며,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이듬해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을 설립하여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3개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체제를 완비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체제로서 산업계 전반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이 됐고, 현재 포스코가 전 세계 철강업계의 기술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으며, 포스텍은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1971년 제철장학회를 설립해 임직원 자녀의 교육 지원을 비롯해 지역사회와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의 기반을 만들고, 이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2개 학교를 세워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사학으로 육성했다. 제철장학회는 최근 포스코청암재단으로 확대 재편돼, 아시아권을 대상으로 하는 권위 있는 복지장학문화 재단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故 박태준 명예회장 연보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박봉관(父)과 김소순(母)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44년(17세) 일본 와세다대 공대로 진학 결심
 
     ▲1946년(19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 마치고 중퇴
 
     ▲1948년(21세) 귀국 후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 남조선경비사관 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6기로 박정희 당시 대위와 첫 대면
 
     ▲1953년(26세) 육군중령으로 5사단 참모. 5사단의 지리산잔비 토벌작전을 위한 부대이동작전 수립 뒤 11월 육군대학 입교
 
     ▲1954년(27세) 육군대학 수석 졸업, 장옥자와 결혼
 
     ▲1957년(30세) 박정희 장군(1군단 참모장)과 재회
 
     ▲1961년(34세) 육군본부 경력관리기구 위원으로 근무 중 5.16 발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1963년(36세) 미국 유학 준비, 육군소장으로 예편
 
     ▲1964년(37세) 박정희의 강력한 요청으로 미국 유학 포기, 대한중석 사장으로 발령
 
     ▲1965년(38세) 일본 최고 제철소 가와사키제철소 견학, 종합제철 프로젝트에 관심
 
     ▲1967년(40세)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위원장에 임명, 박정희의 ‘제철공장 완수’ 특명
 
     ▲1968년(41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사명 확정(영문 약자표기 ‘POSCO’), 초대 사장 취임
 
     ▲1969년(42세) 차관 도입 무산, 대일청구권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 추진
 
     ▲1970년(43세) 포항1기 건설착공, 열연공장, 중후판공장 착공
 
     ▲1971년(44세) 제선공장, 제강공장 등 주요 공장 착공
 
     ▲1972년(45세) 영일만의 첫 공장으로 증후판공장 준공, 첫 제품 출하
 
     ▲1973년(46세) 제1고로 첫 출선 성공, 일관.종합제철공장 완공(연산 조강 103만t 체제), 포항2기 건설 종합착공
 
     ▲1981년(54세) 포철 초대 회장 취임, 제11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민정당) 비례대표 당선
 
     ▲1985년(58세)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착수
 
     ▲1990년(63세) 민정당 대표 취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 출범, 최고위원 취임
 
     ▲1992년(65세) 광양 4기 설비 종합준공
 
     ▲1993년(66세) 해외 유랑, 포철 세무조사로 본인, 가족, 친인척, 측근들에 대한 전방위 비자금 조사
 
     ▲1997년(70세) 5월초 귀국, 포항 북구 보궐선거 당선, 김대중-김종필(DJP) 연대, 자민련 총재 취임
 
     ▲2000년(73세) 자민련 총재 사퇴, 국무총리 취임과 사임, 포철 민영화 완료
 
     ▲2001년(74세) 폐 밑 물혹 제거수술, 포철 명예회장 재위촉
 
     ▲2005년(78세) 포스코청암재단 확장 설립
 
     ▲2008년(81세)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현)
 
     ▲2011년 12월 13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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