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왕' 박태준의 리더십

’철강왕' 박태준의 리더십

  • 철강
  • 승인 2011.12.13 18:41
  • 댓글 0
기자명 방정환 jhbang@snmnews.co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일만과 광양만에서 신화 이뤄
종합제철소 건설 선봉에서 진두지휘
세계 최고경쟁력 포스코의 바탕 구축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부존자원마저 없어 일관제철소의 건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꿈과 같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을 비롯한 포스코맨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영일만에 종합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했고, 잇달아 광양만에 세계 최신예 최대 제철소 건설을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영일만과 광양만의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그 신화의 주역으로 꼽혔다. 지난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해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닛데츠 회장에게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27년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난 박태준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여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쌓았고 훗날 이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의 큰 꿈을 잉태하게 된다.
 
 ◇ 종합제철소 건설의 선봉장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박태준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의 건설의 특명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박태준 명예회장은 제철소 건설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난관을 특유의 결단력과 열정으로 극복하면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철강신화를 일궈낸다. 제철소 건설과정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박태 준 명예회장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 어렵사리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IBRD의 부정적인 전망으로 와해되자 일본의 유력인사들을 일일이 설득해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도록 함으로써 피지 못할 수도 있었 던 일관제철소 건설의 꿈을 만개시킨다.
 
 이와 함께 포스코의 DNA와도 같은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은 박 명예회장이 건설초기 철강역군들을 하나로 만드는 공동 의 좌우명이 됐다. 이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국가의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은 포스코의 설립 근거다. 또한 ‘우향우정신’은 선조 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하며,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 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 ‘제철보국’과 ‘우향우정신’으로 대표되는 시대정신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에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목욕론도 박태준 명예회장의 일면을 이해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다. 박 명예회장은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 정돈, 청소의 습성이 생겨서 안전ㆍ예방의식이 높아지고 최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며 청결한 주변관리를 주문했다. 이 때문에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현장에 샤워시설을 완비했다.
 
 또한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어 전문가 도움을 받아 바닷속에서 13.6km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시공을 점검하기도 했다.
 
 이와함께 철저한 비리근절도 박 명예회장의 한결같이 지향했던 경영철학이다.
 
 1970년대는 설비공급사나 정치권에서 각종 납품 비리 나 청탁 압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이에 박태준 사장은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소위 ‘종이마패’로 불리운 이 메모는 외부압력을 차단하고 비리를 근절하는 상징처럼 전해져 온다.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장교로 투신하고, 한국이 현대경제 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이 되고,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정치인이 되어, 한국에 봉사하고 봉사하는 삶이 끊임 없는 지상명령이었다고 평가한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처럼 평생을 한결같이 조국 발전에 헌신했던 박 명예회장은 32대 국무총리를 맡기도 했다.
 
 이와함께 박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87년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 (RIST) 을 설립함으로써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 3개의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로, 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포항공대는 박태준 설립이사장과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86년 12월 국내 최초의‘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설립했으며 학사운영정책, 신입생 선발 등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함으로써 국내 정상의 대학 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저작권자 © 철강금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