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뜨거운 삶의 한가운데① - 철강인 송원(松園) 장상태 회장

(추모 특집) 뜨거운 삶의 한가운데① - 철강인 송원(松園) 장상태 회장

  • 철강
  • 승인 2020.04.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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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황병성 bshwang@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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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로 동국제강 고(故) 송원(松園) 장상태 회장 20주기를 맞았다. 

 

이날 추모식은 유족과 친지 중심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날 큰아들 장세주 회장은 “선친께서는 대한민국 철강산업 선진화를 위해 평생 혼신을 다하신 철인(鐵人)이셨다”고 회고하며 “선친의 철강에 대한 열정을 본받고, 경영혁신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한국 철강산업 발전을 위해 불꽃같이 살다간 장상태 회장의 삶의 발자취를 ‘뜨거운 삶의 한가운데’ 전기를 바탕으로 세 번에 걸쳐 되돌아 본다. <편집자 주>

■ 동국의 벌판에 서다
장상태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1927년 2월10일 아버지 장경호(張敬浩)와 어머니 추명순(秋命順)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6·25 전쟁 발발 전 1950년 5월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잠시 모교였던 봉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농림부로 들어간다. 국민 90%가 농민이었던 그 시절 농림부에 들어간 것은 엘리트 코스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1953년 농림부의 미국 파견 교육과정에 선발되어 미시간주립대학(경제학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난다. 김숙자(金淑子)와 결혼한 후였고 첫째 아들 세주(世宙)가 태어난 뒤였다. 

미국 유학 2년 뒤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자 아버지 장경호 사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동국제강에서 함께 일하기를 권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정부지원금으로 유학한 것이 걸림돌이 됐다. 다시 1년 동안 농림부에서 근무한 후 결국 사직하고 1956년 3월 동국제강에 전무로 입사한다.  

당시 아버지 장경호 씨는 동국제강을 창업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장성한 아들들 눈에 비추어 봐도 부끄럽지 않고 긍지를 느끼며 전망 좋고 장래성 있는 사업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마침내 선택한 것이 쇠(鐵)를 다루는 업종이었다. 이러한 결심에서 셋째 아들의 경영 참여는 회사 발전에 큰 동력이 됐다. 아버지의 창업정신에 부합하고자 밤낮으로 노력한 그는 창립 10주년이 되는 1964년 사장으로 승진해 경영 전면에 나선다.  

■ 피부에 와 닿는 경영 이념
장상태는 회사를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경영이념의 필요성을 느낀다. 경영자가 되기 전부터 머릿속으로 궁리하고 가슴속에 담았던 야심을 경영이념으로 만들어 1977년 공표했다. 오랜 고뇌 속에 나온 보물 같은 내용이기에 그 의미도 깊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인간 생활의 향상과 개선에 필요한 용품과 용역을 산출하고, 나아가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다.
둘째, 우리는 용품과 용역을 생산하기 이전에 생산하는 사람을 만드는 데 노력한다.
셋째, 우리의 용품과 용역은 품질에 있어 우수하고 가격이 저렴하며 완벽한 서비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넷째, 우리는 항상 시대에 맞추어 모든 제도를 개선함에 노력하고 새로운 기술혁신에 앞장선다.
다섯째, 경영은 전체의 예지를 모아서 결정하고 집행하며, 결과의 보수는 고루고루 종업원 자본에 배분되어야 하고, 나아가 사회에 환원하도록 노력한다.

 “오늘 나는 여러분 앞에서 경영 이념을 밝혔는데 잠시 배경 설명을 하겠습니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창업자 장경호 회장님께서 평소 자식들과 임원들 앞에서 하시던 말씀을 토대로 문서화한 것입니다. 돈을 벌기 전에 먼저 수양해야 하고,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한 뒤에 나랏일도 제대로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치국평천하의 길도 열리는 것이겠지요.”

그가 경영이념을 발표하던 날 간부사원 앞에서 한 말이다. 그렇게 창업자를 회고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는 두툼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그는 호랑이 상을 한 듬직한 사나이였지만 감수성이 예민해 어려운 남의 사정을 들으면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는 인간적인 순수한 면도 있었다. 
 
■ 위기 속에 담글 질 되다
1994년 2월 동국제강 노조의 항구적 무파업 선언은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노사문제가 기업경영의 가장 큰 장애처럼 인식됐던 우리 경제에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노사 관계가 처음부터 좋은 것은 아니었다. 폭력이 동반된 노조와 진통은 ‘동국 사태’라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었다. 시대와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도 이 사건은 장상태에게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으면 회사의 존폐에도 영향을 미칠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버지 장경호 회장이 세운 동국제강에 들어와 20년 넘게 젊음과 열정을 바쳐 일해 온 회사에 갑자기 몰아닥친 거센 바람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된 후 그는 1995년 7월 15일 부산제강소를 방문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국제강이 만들어낸 노사 화합의 모습은 남들보다 앞서서 만들어낸 좋은 전통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성숙한 사람이고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노사문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전착했는지, 그리고 노사문제를 잘 풀어온 부산제강소 임직원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있었는지, 한때 큰 시련을 잘 이겨낸 사람의 짙은 감회가 담긴 말이었다. 1980년 4월 질풍 같은 바람이 몰아쳤던 부산제강소였기에 그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다. 이 같은 진통을 겪고 난 후 동국제강 노조는 ‘항구적 무파업 선언’을 할 정도로 업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아버지 장경호 회장과 함께 유럽 여행중 촬영한 사진. 


■ 편견과 오해의 화살
 장상태는 1986년 6월 연합철강을 인수한다. 당시 5공 정부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국제그룹이 억울하게 해체될 때 연합철강을 인수함으로써 한동안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이는 참외밭을 지나면서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다. 또 다른 오해는임원인 K씨(부사장 역임)가 5공 당시 권력자로 알려진 이모 씨와 친분이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합철강을 인수한 후 동국제강은 오랫동안 경영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앞의 말이 진실이었다면 이런 회사를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38%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의 영향력 행사로 경영은 번번이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러나 회사 발전을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르고 합법적인 증자도 필요하며, 해외 투자도 필요하다는 집행부의 계획에 노조가 동조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고 난 후 2001년 1월 ‘유니온스틸’로 사명을 변경해 새로운 약동의 시대를 열었다. 

그가 연합철강을 인수하며 많은 오해와 언론의 따가운 눈총에도 반론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장경호 회장의 평소 가르침 때문이다. 창업자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겉으로 보이는 나(我)는 참된 나가 아니다’는 법언(法諺)을 믿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강한 편견과 맞서 싸우고 견디어 낸 방법이 적극적인 반론보다 침묵이었다. 그 침묵의 의미는 훗날에야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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