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영원한 가난은 없다 - 성원제강 그룹 故 현죽(玄竹) 서원석 회장

(추모 특집) 영원한 가난은 없다 - 성원제강 그룹 故 현죽(玄竹) 서원석 회장

  • 철강
  • 승인 2020.04.29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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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황병성 bshwang@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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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임으로 알고 실천 
사회의 빛과 등불이 된 삶 위대하기에 본받아야

■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경영자

성원제강 그룹 현죽(玄竹) 서원석 회장이 지난해 4월 3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이 시대의 마지막 ‘근검절약과 나눔이란 양 날개의 철학’을 실천하고 살았던 고인은 1927년 11월 전북 김제시 진봉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찢어지는 가난이 싫어 17세 되던 해 쌀 두 가마니를 지고 무작정 상경해 성원제강을 창립해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시킨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평생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와이셔츠, 보푸라기가 잘게 인 양복, 주름진 구두, 낡은 지갑에는 여느 직장인들과 비슷한 현금밖에 없었고, 자주 먹는 점심 메뉴는 자장면이나 라면이었다. 이처럼 그는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스스로에게는 관대하지 않았다. 평생 술과 담배는 가까이한 적이 없는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그토록 근검절약하며 살았던 것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받았던 설움 때문이다. “가난보다 창피스럽고 무력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오래갔다. 모진 마음으로 그때 나는 결심했다. 새끼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며 반드시 가난에서 벗어나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한 언론의 칼럼에서  쓴 글이다. 그 다짐 덕분에 그는 큰 오점을 남기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그의 결연함은 당신 삶뿐만 아니라 성원제강을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한몫했다. 성원제강은 일제 강점기 한국경제가 어두운 시기에 태어난 국내 최초 철강 제조업체였다. 6·25 이후 1960년대 국가재건 사업과 1970년대 개발연대라 일컬어지는 국가 기간산업 발전시대에 구로공장을 주축으로 한 수도권 철강공업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1961년 이천무역을 설립한 후  수출품을 만드는 기간산업의 필요성을 느끼며 주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것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 철강회사를 설립했다고 했다. 이후 정부의 철강 연관 산업의 탈 수도권 이전 정책으로 1990년 포항으로 이전해  강관 제품을 주로 생산해 왔다. 특히 2008년 12월 30일 일본공업규격표시인증(JIS)을 받을 정도 강관 제품은 국내외서 인증 받고 있다. 

이처럼 꿋꿋하게 철강 한 우물만을 파며 외길을 걸어온 집념과 끈기가 국내 철강 산업의 산 역사를 쓰는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위기도 있었다. 오랜 시간 기업의 터전이었던 영등포를 떠나야 했을 때는 막막함이 컸다. 포항으로 이전한 후 재창업 각오로 정진한 결과 회사가 안정화되자 불청객 IMF의 거센 파도가 회오리처럼 몰려왔다. 

서원석의 경영 철학은 이런 위기에서 더욱 빛났다. 무리한 규모의 확대 대신 기술개발과 제품 연구로 내실을 다졌다. 직원들에게는 “미룬 일은 잊어버린다. 오늘 일은 오늘 끝내자”라는 말을 주지시키며 다독거렸다. 그 또한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뛰었다. 그 결과 매출 증가로 성과가 이어졌고, 힘겨웠던 IMF 파도를 무사히 넘어올 수 있었다. 

그의 경영관은 남달랐다. 그가 어느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회사의 사세를 확장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일부 기업이 그랬듯이 인수합병을 통해 거대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삼성을 부러워했으면서도 정작 나는 과거에 몸담았던 삼양사 쪽 경영관을 채택했다. 그래서 꿈이 큰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나 내실을 중시하며 흠잡을 데 없이 사업을 했고, 이만큼 달려왔으니 후회는 없다.”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2008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2008년)

■ 나누는 것이 제일 행복했던 위대한 삶

그는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었던 만큼 자기 자신에게 철저히 인색했던 인생을 돌아보면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술회(述懷)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먹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회사가 을지로 입구에 있을 당시 가까운 중국집에서 흘러나오는 자장면 냄새를 고통스럽게 맡으면서도 자장면 한 그릇 쉽게 사 먹지 못했다. 그때 그렇게 나 자신에게 인색했기 때문에 지금 나의 집무실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는 것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스스로에게는 구두쇠였지만 그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말할 수 없다.”면서 평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자신의 소임으로 알고 실천했다. 장녀 서혜경 씨는 “어쩌다 외식 할 때 비싼 것을 시키면 불호령이 떨어질 정도로 구두쇠였다. 자신과 가족에게는 지독하게 가혹했지만, 남들에게는 개안수술비, 어르신 및 효자·효부에게는 매년 돈을 내놓았다.”면서 “지독한 아버지의 눈물 속에서 자비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고, 어릴 때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원석 회장이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할머니의 역할이 컸다. 누구나 먹고살기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 그 와중에서도 할머니는 당신이 먹을 것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먹을 게 없어 며칠씩 굶는 모습을 보았다. 호기심에 자신도 할머니를 따라 하면서 그는 나누는 즐거움을 깨달았고, 보고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고향인 김제와 거주지 종로에 노인정을 건립해 매월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벌이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99년에는 ‘현죽재단’을 설립한 후개안 수술 비용을 지원해 1,500여 명의 시각 장애인들에게 밝은 빛을 선물했다. 그리고 현죽효행상을 제정해 매년 전국의 효자·효녀·효부를 발굴해 격려했다. 이러한 나눔의 생활은 2008년 국민훈장 ‘모란장’이라는 영광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는 속절없는 인생이지만 있을 때 나누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회사를 창립해 경영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이익이 생기면 사회에 환원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어른을 공경하며, 효(孝)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생전의 노력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아낌없이 주는 거룩한 기업가 정신도 우리가 본받아야 하기에 추모 1주기를 맞는 의미가 남다르다. 사회의 빛과 등불이 되었던 그의 삶은 위대하기 때문이다.

한편,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서원석 회장과 이소윤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는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큰딸은 외국유학 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한 서혜경이며, 둘째 딸은 미국 유수대학 건축과를 나온 혜림, 막내딸 혜주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두 아들 상준, 해봉은 미국 유수 경영대학을 나와 성원제강그룹을 각각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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