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성 칼럼 - 청암 박태준 명예회장을 추모하며…

황병성 칼럼 - 청암 박태준 명예회장을 추모하며…

  • 철강
  • 승인 2021.12.13 06:05
  • 댓글 0
기자명 황병성 bshwang@snmnews.co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스코가 국가 산업의 동력이 되어 대단히 만족스럽다.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길 바란다. 애국심을 갖고 일해 달라.”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0년 전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이다. 그는 2011년 12월 13일 바람이 유난히 차가운 날 세상과 이별했다. 차가운 성질의 철을 닮은 계절에 숙명처럼 그는 작별을 고했다. 세계적 기업 포스코를 탄생시킨 경영자였고, 동서 화합과 남북통일을 위해 애썼던 정치가로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현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을 보면 그의 리더십이 새삼 그립다. 우리가 존경스러운 마음을 갖게 했던 훌륭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는 언행일치와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포스코를 세계 최고 철강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국내 최고 수준의 14개 유·초·중·고교와 세계적 연구중심 대학 포스텍을 설립하기도 했다. 생전 자기가 한 말을 실체적 위업(偉業)으로 이뤄냈다. 그의 삶에서 필생의 사상적 두 축이었던 ‘제철보국’과 ‘교육보국’을 함께 실현한 것이다. 평소 철강 산업을 일으켜 국가 건설의 초석이 되고 교육이 일본을 앞서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이 이 같은 업적을 낳게 했다.

청암은 애국을 입버릇처럼 강조했고, 스스로 실천하며 살았다. 25년간 사장을 하면서 포스코 주식을 단 한주도 안 가졌다는 일화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膾炙)된다. 그는 그 이유를 “포스코는 돈으로 셈할 수 없는 영혼이 깃든 회사다. 나는 오직 국가와 민족에게 나의 목숨을 다 바쳐 포스코를 창립했을 뿐인데, 목숨을 바친 내가 어찌 돈을 챙기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이처럼 오직 국가를 위한 청렴결백한 그의 삶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그는 인생의 황혼기였던 70세(1997년)부터 서거 때(2011년)까지 염원하고 추구했던 소망도 큰 의미로 남았다. 특히 정치가가 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호남 화합을 위해 유난히 심혈을 기울였다. 더불어 포스코가 원산에 제철소를 세워 북한의 국가기간산업을 안정시키고 평양에 가서 경제개발 조언도 해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염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정치적 지역감정이 여전하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볼 때 그의 숭고한 뜻은 후세가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됐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된 지금 업적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가 쌓은 공적의 탑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만들어낸 위업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공적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그것을 성취하려고 했던 그의 정신, 고뇌, 실천이다. 이 무형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후세에 전해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 몫이 됐다. 이러한 취지의 하나로 3일 포스코센터 아트홀에서 열렸던 추모음악회는 의미 깊은 행사였다. 포스코미술관의 추모사진전도 그의 모습을 회상하고, 삶을 되돌아보며 ‘박태준 정신’을 일깨우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처럼 살다 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어리석은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런 삶은 절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삶은 덧없는 인생일 뿐이다. 하지만 박태준의 삶을 따라가 보면 충실함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그의 머릿속은 항상 애국(愛國)이라는 생각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면(永眠) 후에도 그의 이름이 우리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이유다. 서거 10주년, 더 편한 안식을 기원하며 그의 뜻과 정신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 철강금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