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진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과 교수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한낮의 햇빛은 여전히 따갑지만, 이제 그 햇볕은 습기를 잔뜩 머금은 한여름의 뙤약볕이 아니라 청명한 하늘 아래 오곡을 여물게 하는 가을볕이다. 혹독하게 더웠던 여름, 산업 현장 곳곳은 생산의 열기까지 더하여져 더 뜨거웠다.
특히 철강산업은 용광로에 철광석과 코크스를 넣고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어 쇳물을 만드는 제선 공정에서부터, 이를 전로에서 산소와 반응시켜 강철로 만드는 제강, 액체 상태의 강철을 급속 냉각해 고체로 굳히는 연속주조, 그리고 강철 덩어리를 누르고 늘려 최종 제품을 만드는 압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엄청난 열을 내뿜는다.
‘산업의 쌀’인 철을 생산하여 국가에 보답한다는 제철보국(製鐵保國)을 기치로 불모지에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철강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조선, 자동차, 건설, 기계, 가전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의 성장 기반이 되었고, 우리 경제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한때 지금의 반도체산업과 같은 위상에 있던 철강산업이 지난 여름의 폭염만큼이나 뜨거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전 세계적인 철강 과잉생산 능력이다. 건설수요 둔화 등으로 세계 조강생산은 2021년 정점을 기록한 이후 감소세를 보이는 반면, 생산능력은 계속 증대하고 있다. OECD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철강 생산능력은 약 24억5천만 톤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수요를 넘어서는 과잉생산능력만 6억4천만 톤에 달했다. 2028년에는 이 격차가 더욱 벌어져서 과잉 생산능력이 7억4천5백만 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압도적인 생산국은 중국이다. 중국은 2025년에 약 9억6천만 톤의 조강을 생산해 전 세계 생산량 18억4천9백만 톤의 52%를 차지했고, 우리나라는 약 6천2백만 톤을 생산해 세계 6위의 철강 생산국에 올랐다. 이렇게 생산된 철강의 상당량은 국제시장으로 향한다. OECD가 집계하는 2025년 세계 철강 수출은 약 3억2천만 톤에 달했고, 특히 중국은 내수 부진과 공급과잉 속에서 1억3천1백만 톤을 수출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는 세계 철강 수출의 약 40.8%에 해당한다.
중국의 부동산 경기 침체와 건설·인프라 수요 둔화로 내수가 정체되는 가운데 막대한 생산능력이 수출로 향하면서 세계 철강시장의 가격과 경쟁 여건에도 상당한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세계 철강산업은 수요는 정체되거나 완만하게 증가하는 가운데 생산능력은 계속 확대되는 구조적 과잉공급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둘째, 철강 제품에 대한 무역구제조치를 비롯한 보호무역조치의 전 세계적인 확산이다. 중국의 공급과잉으로 중국산 철강의 수출이 증대하면서 각국이 중국산 철강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제품까지 함께 규제 대상이 되어 주요 수출시장에서 각종 수입규제를 받고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수출하는 열연강판, 냉연강판, 도금·내식성 강판, 유정용 강관을 비롯한 각종 철강 제품에 반덤핑관세와 상계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2018년부터 적용해 온 약 263만 톤의 무관세 쿼터를 폐지하고,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하여 국가안보를 이유로 5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철강 자체뿐 아니라 일부 철강 파생제품에 대한 규제도 확대되고 있다.
EU 역시 기존의 철강 세이프가드 조치를 대폭 강화하여 전체 무관세 쿼터를 3천382만 톤에서 1천835만 톤으로 약 46% 축소했고, 우리나라에 배정된 쿼터도 약 207만 톤으로 20% 가까이 줄였다. 쿼터를 초과하는 수입에는 50%의 관세가 부과된다. 여기에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을 통해 수입 철강의 생산 과정에서 배출된 탄소에 비용을 부과하고 있어 우리 철강산업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한·미 FTA와 한·EU FTA를 통하여 미국과 유럽 시장에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과 EU가 철강에 대해 일반관세와 별개의 국가안보조치, 세이프가드 등 새로운 통상수단을 활용하면서 FTA가 제공해 온 시장 접근의 이점이 잠식되고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일본도 최근 우리나라와 중국산 용융아연도금강판에 대하여 30-38% 안팎의 초고율 반덤핑관세를 잠정 부과하고 있으며, 중국, 인도, 베트남, 튀르키예, 태국, 대만, 멕시코 등 주요 철강 수입국들도 각종 반덤핑·상계관세와 세이프가드 등 수입규제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주요 수출시장이 갈수록 줄어드는 가운데 국내 건설 경기 침체와 자동차산업의 성장 둔화 등으로 내수시장도 녹록지 않다. 수출시장과 내수시장이 동시에 어려워지는 상황인 것이다.
셋째, 철강산업을 둘러싼 국가 간 산업정책 경쟁의 심화다. 과거에는 주요국의 철강산업 정책이 수입규제나 생산기반 확대 등 개별적인 통상 혹은 산업정책 수단에 집중되었다면, 최근에는 미국과 EU를 비롯한 주요국들이 철강산업을 경제안보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산업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통상·산업·에너지·기후·공급망 정책을 망라한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대규모 재정 지원과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해 자국 철강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한다. 미국은 전통적인 Buy American Act 정책과 철강 관세를 비롯해 대규모 인프라 투자, 리쇼어링 지원,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제조업에 대한 지원, 국방 산업 확대 등을 통해 자국 내 생산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EU 역시 철강 쿼터를 축소하는 한편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도입하고, 청정산업과 저탄소 철강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일본도 탈탄소 제철 및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등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주요국 정부가 대규모 재정 지원과 적극적인 산업육성정책을 통해 시장에 개입함에 따라 우리 철강기업들은 이제 외국의 철강기업뿐 아니라 산업정책을 이끄는 외국 정부와 경쟁하는 현실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순한 경기침체로 볼 수 있을까. 우리 철강산업은 일시적인 불황이 아니라, 중국의 공급과잉, 주요국의 산업정책 경쟁, 탄소중립 요구의 확산으로 세계 철강시장의 질서가 재편되는 구조적 위기에 처하여 있다.
그렇다면 치열한 정책 경쟁의 시대에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개별 기업을 지원하거나 우리 산업을 외풍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나 정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 기업이 이익을 창출하도록 지원하거나 경쟁력을 상실해 시장에서 낙오되는 산업을 무조건 보호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산업이 다른 나라 기업들과 같은 출발선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은 정부의 마땅한 책무다. 철강산업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것은 철강산업 자체를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통상 환경 속에서 우리나라 제조업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단기적으로 불공정한 무역행위에 대해서는 반덤핑관세나 상계관세 등 무역구제제도를 적극 활용해 시장 왜곡을 시정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해야 한다. 특히 제3국에서의 단순 가공이나 생산공정의 변경 등을 통해 이미 부과된 반덤핑관세를 회피하는 우회수출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도록 관련 법적 근거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국가 산업정책의 틀 안에서 전기로의 확대와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등 탄소배출을 줄이는 친환경 공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전기차용 초고장력강, 반도체용 특수강, 풍력 발전용 후판, LNG 저장탱크용 고망간강 등 고부가가치 특수강 개발에 필요한 투자를 지원해야 한다. 최소한 우리 전략산업이 다른 나라의 산업정책으로 인해 불리한 출발선에 서지 않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철강산업의 위상이 비록 예전 같지는 않아도 철은 여전히 산업의 쌀이고 철강산업은 국가 제조업의 출발점이다. 철강은 조선, 자동차, 기계, 방산을 비롯한 전통적인 주력산업은 물론 전기차, 재생에너지, 반도체, 수소, 우주항공, 로봇, AI 등에 이르는 미래산업의 기반이다. 따라서 철강산업을 지킨다는 것은 특정 기업이나 특정 산업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만들고, 어떤 산업을 국내에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세계 철강산업의 질서가 재편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철강산업을 지키는 정책이 아니라 미래 제조업을 가능하게 할 철강산업을 만드는 정책이다. 이제 우리나라 철강산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철강산업을 만들어야 하는가. 지금이 바로 그 답을 찾아야 할 때다.

